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는 수 세기 동안 ‘경쟁’과 ‘질투’라는 키워드로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실제로 적대적이었는가? 본문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대중문화 속 허구를 분리하여, 이 신화의 기원과 진실을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모차르트 vs. 살리에리, 고전시대의 예술적 숙명의 진실
18세기 후반, 유럽 음악계의 중심지였던 빈(Wien)은 수많은 작곡가들이 활동하며 각축을 벌이던 문화의 용광로였다. 이 가운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동시대를 살았고, 동일한 공간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이 둘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질투’, ‘재능’, ‘죽음’이라는 드라마틱한 이미지로 엮여 회자된다. 특히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는 살리에리를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질투를 느껴 독살한 인물로 묘사하며, 대중 인식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정은 **문학적 창작과 예술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모차르트는 실제로 1791년 12월 5일, 병으로 사망했으며, 그 원인으로는 류마티스열, 신장질환, 또는 연쇄감염 등이 제기되고 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죽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모차르트의 자녀 교육에 도움을 주고, 그의 작품을 연주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둘러싼 ‘경쟁’과 ‘살인’의 이야기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실제 역사에서 살리에리는 빈 궁정악장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며 정치적 기반이 강한 작곡가였고, 모차르트는 천재적 음악성을 가졌지만 비교적 불안정한 재정적 기반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때때로 같은 오페라극장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경쟁자로서 비교되었지만, 상호 비방하거나 적대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레퀴엠》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재능을 존중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실제 관계, 신화의 생성 배경, 그리고 대중문화가 역사 인식에 미친 영향을 고찰함으로써,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술가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신화의 탄생: 모차르트를 죽인 건 음악인가, 인간인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에 대한 대중적 오해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의 1830년 단편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질투한 살리에리가 독살을 감행하는 이야기로 구성되며, 예술가의 고뇌와 인간적 나약함을 탐구하는 철학적 비극이다. 이후 이 희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해 오페라로도 각색되었고, 살리에리의 이름은 곧 ‘재능 없는 자의 질투’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로부터 약 150년 후인 1984년, 미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가 쓴 연극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아마데우스》는 푸시킨의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었다. 이 작품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신에게 저주받은 자’로 인식한다. 그는 신의 불공정함을 원망하며, 그 분노를 모차르트에게 향하게 한다. 영화는 이 구도를 극적으로 활용하여 예술과 신앙, 재능과 노력, 인간성과 질투라는 보편적 주제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과 음악학자들은 **살리에리를 독살범으로 설정한 것이 전적으로 허구임을 명확히 한다.** 빈 시립기록보관소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사료들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비방하거나 위해를 가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며, 오히려 **두 사람의 음악적 교류와 상호 존중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더 많다. 예컨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될 수 있도록 궁정의 반대 의견을 무마한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후원하는 역할을 지속했다. 이러한 신화의 지속은 결국 **예술가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 서사적 욕망**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은 ‘고통받는 천재’와 ‘질투에 사로잡힌 평범한 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선호하며, 그것이 모차르트의 전설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그러나 그 서사 속에서 **살리에리라는 인간과 예술가의 정체성은 축소되고 왜곡**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재조명의 대상이 되어야 할 지점이다.
음악사의 어두운 신화와 진실의 복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두 작곡가의 관계를 넘어서,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문화적 허구의 생성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신화로서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예술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허구일 경우 실제 인물의 삶과 명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도 경계하게 만든다. 살리에리는 단지 모차르트의 조연이나 악역이 아닌, 18세기 빈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음악가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였다. 그는 모차르트와 달리 음악 외적으로도 능숙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으며, 당대 음악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의 오페라와 종교음악은 당대에 널리 연주되었고, 음악사적으로도 재조명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모차르트 또한 신화 속의 고통받는 천재가 아닌, 치열하게 현실과 맞서 싸운 **예술적 전략가이자 창조적 실천자**였다. 그는 당대 대중의 기호에 맞춘 작품을 능수능란하게 제작하며,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 구조와 논리, 감성의 완벽한 결합체였으며, 이는 그가 단지 ‘영감받은 자’가 아닌, **지적 통찰을 지닌 작곡가**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인물을 적대적 구도에서 해방시키고, 각각의 위치와 역할을 독립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예술의 위대함은 타인을 무너뜨리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들은 결국 음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빛났던 존재들이었다.